여해 강원용(如海 姜元龍) (1917~2006)
강원용(姜元龍) 목사는 1971년에 일제강점기 함경도의 가난한 화전민 아들로 태어나, 열다섯 나이에 그리스도를 만났다. 소년 가장으로 농사를 짓던 청년 강원용은 민족 교육의 보루였던 북간도 용정으로 건너가 은진중학교에 입학, 그곳에서 평생의 스승 장공 김재준 목사와 더불어 윤동주, 문익환 등 은진 동문과 함께 공부하면서 기독교 정신과 민족의식을 내면화한다.
 
강원용 목사는 은진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학원 영문학부에서 공부하던 중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학업을 포기하고 돌아온다. 북간도 용정에서 교사였던 부인 김명주 여사와 결혼한 강원용 목사는 만주와 회령에서 농촌선교운동을 벌이던 중 회령에서 해방을 맞았다. 해방 직후 공산치하를 피해 서울로 내려와 선린형제단을 조직하고 경동교회의 모체인 선린전도관을 세운 후 김재준 목사를 모시고 경동교회를 세웠다. 한신대학교에 다니며 활발한 기독청년운동을 펼치던 강원용 목사는 1946년부터는 기독청년연합회 임원 자격으로 여운형과 김규식이 이끄는 좌우합작위원회에서 청년대표로 활동하는 등 좌도 우도 아닌 창조적 통합의 길을 모색하는 기독교 민족운동을 펼쳤다. 1949년, 목사 안수를 받고 한국전쟁 와중에도 부산에서 학생선교와 기독청년운동에 매진했고, 휴전 직전인 1953년 8월, 캐나다 선교 단체의 후원으로 북미유학길에 올랐다.
 
은진중학교 은사인 브루스 교장의 도움으로 캐나다 매니토바대학을 무사히 마친 강원용 목사는 라인홀드 니버와 폴 틸리히가 교수로 있는 미국 뉴욕 유니언신학대학에 입학, 두 신학 거장으로부터 ‘사랑과 정의에 기초한 중간자의 길과 인간화의 길’이라는 두 가지 시대적인 명제를 확인, 평생의 화두로 삼게 된다. 유니언신학대학을 졸업한 강원용 목사는 사회과학에 관심을 돌려 뉴스쿨대학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1957년 경동교회로 돌아온다. 경동교회의 담임목사로 취임, 평생을 주의 종으로 산 강원용 목사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공의가 이 땅에서 이뤄지길 소망하며, 신앙인으로, 시대의 스승으로, 빈들에서 외치는 소리로, 그 한 길을 걸어왔다.
 
“기독교의 사명은 기독교화가 아니고 인간화이다. 하나님은 크리스챤이 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된 것이다.”
 

신앙인(교회)의 사회적 책임
강원용 목사의 평생 일관된 외침은 인간화였고, 이를 구현하기 위하여 '교회갱신'을 통한 '사회개혁'에 매진했다. 교회갱신은 신앙의 갱신이자 크리스챤의 예언자적 책임, 즉 신앙인의 사회적인 책임을 포괄한다. 그리하여 교회갱신은 곧 사회개혁의 신앙적 밑거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두 가지의 갱신은 둘이 아니라 하나인 사명, 즉 기독교인이자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받들어야 하는 실존적ㆍ시대적 사명으로 수렴된다.
 
평생을 경동교회와 크리스챤아카데미를 중심으로 활동한 강원용 목사가 한국 교회와 사회에 남긴 유·무형의 유산과 말씀 선포는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 사랑의 힘으로 사회 정의와 평화의 파수꾼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선포는 점점 더 양극화 분열로 치닫는 이 사회에서 기독교인의 사명이 무엇인지 다시금 깨닫게 한다. 또한, 강원용 목사는 기독교의 토착화, 에큐메니칼 운동을 이끌며 이 땅의 교회가 ‘그리스도 안의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산 증거로 보여주었다.
 
“인간 회복이란 주체자가 됨이요, 기쁨을 찾는 것이요,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이다.”
 
세계교회운동과 종교 간의 대화
강원용 목사가 세계 교회와 처음 만난 것은 1954년 캐나다 유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카고 에번스턴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 2차 총회에 참석한 강원용 목사는 이후 WCC 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하며 세계 교회를 한국에 가져오고 한국 교회를 세계로 가져간, 쌍방 통행의 디딤돌이 되었다. 강원용 목사는 1961년 뉴델리에서 열린 WCC 3차 총회에 참석하고 나서, ‘교회의 일치는 각기 다른 배타적인 표현 안에서 이뤄지는 의미의 포괄적 일치’라는, 즉 ‘그리스도 안에서 세계인이 하나가 되는 개방적이고 역설적인 일치’임을 깨닫고 ‘종교 간의 대화’라는 새로운 화두에 눈을 뜨게 된다. 이는 한국에서 종교 간의 대화가 활발히 진행된 신앙적 출발점이기도 했다.
 
또한, 강원용 목사는 WCC 총회에서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력하게 주장, WCC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에 반대하고 서구 선진국 교회에서 제3세계 도시빈민과 노동자를 위한 지원 기금을 강제로 조성하도록 하는 등 WCC 중앙위원으로 큰 역할을 하게 된다. 더불어 강원용 목사는 세계 교회를 향해 기독교가 전통적으로 추구해온 서구 중심의 문화를 거부하고 지구촌 안에서 인종, 문화, 성별의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길임을 강력히 주장했다. 보수적인 분위기가 팽배한 당시의 상황에서 여성의 목사 안수를 주장했으며, 청년의 참여를 보장하는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기도 했다. WCC 회의에서 영어와 스페인어 등 서구의 공식 언어만을 사용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 제3세계 나라들의 언어도 공식 회의에서 사용하도록 관철하기도 했다. 그 후 강원용 목사는 아시아기독교협의회, 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를 이끌며 아시아를 대표하는 종교 지도자로 아시아 국가들의 사회문제 해결과 평화운동에 일생을 헌신했다.
 
“나와 너, 나와 역사의 올바른 관계에서 가치 있는 삶을 사는 창조적인 인간이 생겨난다.”
 

대화운동과 사회개혁
강원용 목사는 1959년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회를 조직하고 대화운동을 통해 전후 폐허가 된 한국사회가 나가야 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데 헌신한다. 이 운동은 독일 아카데미 운동의 창시자인 뮐러 박사의 재정적 뒷받침으로 1962년의 한국크리스챤아카데미의 창립으로 이어졌고, 그 후 지금까지 한국 사회가 압축 성장 과정에서 부딪혀온 제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그 이론적, 실천적 토대를 제공해왔다.
 
인간화를 위한 종교 간의 대화, 노사 간의 대화, 양극화 해소, 양성평등문화, 방송개혁, 교육개혁, 민주화, 생명평화 등 크리스챤아카데미가 이끌어온 대화의 주제는 지난 반세기, 지성적 현실참여의 든든한 기반이 되어주었다. 1995년, 크리스챤아카데미가 30주년을 맞았을 당시를 기준으로 대화모임 500회, 사회교육 400회, 연구모임 185회, 출판물 86종이라는 기록을 남긴 것만 보더라도, 또한 대화모임과 아카데미 활동에 관여해온 많은 인사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큰 역할을 하는 것을 보더라도 이 운동이 한국 사회에 남긴 유산은 두고두고 기억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우리는 증오에는 사랑으로, 억압에는 자유로, 불의에는 정의로 도전할 것이다.”
 

민주화를 위한 중간집단 형성과 지도력 육성
고도의 산업화를 이뤄가던 1970년대엔 우리 사회 곳곳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농촌 경제는 몰락했고 도시로 몰려든 노동자는 산업 역군이라는 정치적 구호에 묻혀 열악한 노동환경에 시달려야 했다. 강원용 목사는 이러한 비인간화의 근원적 원인이 정치화와 양극화에 있다고 판단, 이를 해결할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그 실천적 해답이 바로 '중간집단 교육'이었다. 농민, 노동자, 여성, 종교 등 사회 부문별로 민주 시민의 길을 교육함으로써, 중간 집단을 양성, 이를 민주화와 양극화를 해결하는 사회적 토대로 삼고자 한 것이다. 세계교회와 독일 교회의 후원으로 수원에 <내일의 집>을 마련해 1974년부터 시작한 중간집단 교육은 1979년 아카데미반공법사건 탄압으로 중지될 때까지 5년간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이 성공적인 중간집단 교육은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기초를 닦았고 노동자, 농민, 여성의 권익 보호와 이후 사회운동의 발판이 되었으며, 민간영역에서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중간집단 교육은 강원용 목사와 크리스챤아카데미가 가꿔낸 한국 민주화의 아카데미였다. 우리나라가 1980년대 이후 산업화와 민주화의 두 축을 이루면서 극심한 혼란이나 전체주의적 독재로 치닫지 않고 선진국의 문턱에 오게 된 것은 많은 요인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이 중간집단 교육을 통한 지도력에 빚진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와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요, 사랑의 삶 속에 이미 구원이 있는 것이다.”
 

방송개혁, 여성운동, 문화운동...
강원용 목사는 우리나라 방송 발전에도 큰 역할을 해왔다. 1960년대 방송윤리위원장을 지내고 그 후 노태우 정부 때(방송위원장)과 국민의 정부 때(방송개혁위원장)을 맡아 한국 방송의 기틀을 잡는 역할을 마다치 않았다. 이는 방송의 사회적 책임을 누구보다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정권의 나팔수로 전락한 공익 방송의 정상화, 권력과 자본으로부터의 방송 독립은 그의 오랜 숙원이었다.
강원용 목사는 우리나라 여성운동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그리고 중간집단 교육에서 여성이 스스로 목소리를 높이도록 늘 용기를 북돋아주었고 특히 여성 목사 안수 문제는 수십 년간 한국 교회와 세계 교회를 향해 지침 없이 외칠 정도로 열정을 보였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이끄는 여성 지도자 중 강원용 목사의 직간접인 영향을 받지 않은 인사가 없을 정도로 그는 한국 여성운동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불안이 우리의 영혼과 운명을 갉아먹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강원용 목사가 우리나라 문화 발전에 이바지한 바는 적